찰스 시믹

짧은 영시 (204-1) 찰스 시믹 / 그림으로 가득 찬 책 A book full of pictures

차일피일 2026. 2. 28. 00:01

그림으로 가득 찬 책

에드윈 오스틴 애비의 "리처드 공작과 레이디 앤" (Richard, Duke of Gloucester, and the Lady Anne, 1896)

 

찰스 시믹

 

 

아버지는 우편 통신으로 신학을 공부하였으며,

지금은 시험 기간이다.

어머니는 뜨개질을 하고 있다. 난 그림으로 가득 찬 책을

보며 조용히 앉아 있다. 밤이 깊어가고 있다.

내 손은 차가워졌다, 죽은 왕과 왕비들의

얼굴들을 만지면서.

 

이층 침실에는

검은 비옷이

천장에서 흔들리고 있다,

하지만 그것이 왜 그러고 있는 걸까?

어머니의 긴 바늘들은 빠르게 바늘땀을 떴다.

바늘은 검은색이다,

바로 그때의 내 머릿속처럼.

 

내가 넘기는 책장은 날갯소리처럼 들렸다.

"영혼은 한 마리 새야," 그는 한때 말했다.

그림이 가득 찬 내 책 안에서는

전투가 한창이다, 창과 칼들이

마치 겨울 숲 나무처럼 우뚝 서 있고,

내 심장은 그 가지에 박혀 피를 흘리고 있었다.

(번역 / 필자)

 

 

찰스 시믹의 이 시는 그의 어릴 적 전쟁의 기억을 배경으로 한 시이다. 전쟁 상황의 암담함, 그 앞에 무기력한 인간의 운명, 인간의 고통을 구원할 신의 부재 등을 은유적으로 말하고 있다.

 

첫째 연에서,

 

'아버지는 우편 통신으로 신학을 공부하였으며,

지금은 시험 기간이다.'

(Father studied theology through the mail

And this was exam time.)

 

라고 하였다. '신학' (theology)은 '신' (God)을 상징한다. 아버지는 세계를 전쟁의 고통 속에 방치한 신을 찾지 못하고 있다.

 

어떻게든지 신을 찾아 구원을 얻으려고, '우편 통신으로' (through the mail) 신학을 공부하고 있다. 그리고 그 결과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음을 '시험 기간' (exam time)으로 표현하였다.

 

'어머니는 뜨개질을 하고 있다' (Mother knitted). 아직 아이인 시인은 '그림으로 가득 찬 책' (a book full of pictures)을 보며, 조용히 앉아 있다.

 

'어머니' 는 보통 사람을 상징하며, 전쟁과 상관없이 평소처럼 행동하고 있다. '그림으로 가득 찬 책' 은 전쟁의 참상으로 얼룩진 세계 역사를 상징한다.

 

'밤이 깊어가고 있다' (Night fell)라고 하여, 전쟁이 세계 도처에 확대되고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죽은 왕과 왕비들의 얼굴들' (faces of dead kings and queens)을 만지면서, 시인의 손이 차가워지고 있다고 하였다.

 

책 속의 '죽은 왕과 왕비들' 은 구시대의 유물로서의 왕정을 상징함과 동시에,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각국의 지도자들을 아울러 상징한다.

 

둘째 연에서,

 

'이층 침실에는

검은 비옷이

천장에서 흔들리고 있다,

하지만 그것이 왜 그러고 있는 걸까?'

 

라고 하였다. '검은 비옷' 은 전쟁으로 희생되는 무고한 사람들을 상징한다. 그들이 왜 죽어야 하는지를 모르겠다고 하면서 전쟁의 부조리를 시사하고 있다.

 

'어머니의 긴 바늘들은 빠르게 바늘땀을 떴다.

바늘은 검은색이었다,'

(Mother's long needles made quick crosses.

They were black)

 

라고 하였다. '검은색 바늘로 빠르게 따는 바늘땀' 도 전쟁으로 순식간에 목숨을 잃는 사람들을 상징한다.

 

'십자 자수로 바늘땀을 빠르게 떴다' (made quick crosses)에서, 'cross' 는 '십자가' 의 뜻을 함축하고 있으며, 검은색과 함께 죽음을 상징한다.

 

'바늘은 검은색이었다,

바로 그때의 내 머릿속처럼.'

(They were black

Like the inside of my head just then.)

 

이라고 하였다. 세계의 상황이 암흑처럼 느껴지는 시인의 절망의 심경을 말하였다.

 

셋째 연에서,

 

'내가 넘기는 책장은 날갯소리처럼 들렸다.

"영혼은 한 마리 새야," 그는 한때 말했다.'

(The pages I turned sounded like wings.

"The soul is a bird," he once said.)

 

라고 하였다. 암울한 전쟁 상황 속에서도 아버지는 여전히 영혼의 구원을 갈구하고 있다. '한 마리 새' (a bird)처럼 '영혼' (soul)이 구원을 향해 날아갈 것을 바라고 있다.

 

전쟁 종식과 평화에 대한 염원을 상징하고 있다. 시인도 '넘기는 책장이 날갯소리처럼 들린다' 라고 하여, 희망을 암시하고 있다.

 

하지만 현실은 다르다. 전쟁은 맹위를 떨치고 있고, 이미 시인은 회복할 수 없는 상처를 입고, 트라우마(trauma)에 시달리고 있다.

 

'그림이 가득 찬 내 책 안에서는

전투가 한창이다, 창과 칼들이

마치 겨울 숲 나무처럼 우뚝 서 있고,

내 심장은 그 가지에 박혀 피를 흘리고 있었다.'

 

라고 하였다.

 

 

표제 그림은 미국 화가 에드윈 오스틴 애비(Edwin Austin Abbey, 1852-1911)의 "리처드 공작과 레이디 앤" (Richard, Duke of Gloucester, and the Lady Anne, 1896)이다.

 

 

A book full of pictures

 

By Charles Simic

 

Father studied theology through the mail

And this was exam time.

Mother knitted. I sat quietly with a book

Full of pictures. Night fell.

My hands grew cold touching the faces

Of dead kings and queens.

 

There was a black raincoat

in the upstairs bedroom

Swaying from the ceiling,

But what was it doing there?

Mother's long needles made quick crosses.

They were black

Like the inside of my head just then.

 

The pages I turned sounded like wings.

"The soul is a bird," he once said.

In my book full of pictures

A battle raged: lances and swords

Made a kind of wintry forest

With my heart spiked and bleeding in its branches.